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하게 담아내기에, 2테라바이트의 외장하드 하나는 충분하지 않다. 가진 돈으로 당장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용량이 가장 큰 걸 산 건데. 최초의 기억부터 백업하려던 우진은, 화면 속의 그들 쌍둥이가 엄마 품에서 꿈틀대고 있는데 벌써 용량이 반 이상 찬 것을 보고 좀 우울해진다. 차라리 이 컴퓨터를 통째로 범균에게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박동건이 그의 집을 아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기억들은 김범균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버려져야 한다는 거다.
……아니. 우진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방금 제 생각에 대한 부정이다. 수술이 실패할 리 없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가 범균에게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하든, 혹시 모를 만약에 대한 대비는 필요하므로, 우진은 차츰 어떻게 기억들을 골라낼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김우진의 인생에서, 김범균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는 순간들.
우진은 빠르게 그의 기억들을 처음부터 훑어본다. 가장 첫 번째의 기억.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발단이었을, 열한 살의 김우진이 그리워하던 누군가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나타난다. 열한 살의 김우진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스물한 살의 김우진은 그 얼굴로부터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다음, 다음, 다음 기억. 우진은 계속해서 명령하고, 그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기억들은 그렇게 지나가버린다. 그들 셋이 최초로 세상 밖에서 마주한 날. 어머니와 함께 놀러나간 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어머니에 관하여 남겨져야 할 기억은 그렇게 축약될 뿐이다. 그 건조한 결론이 안타까워서, 우진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던 쌍둥이는 시간이 가며 그들이 이란성 쌍둥이임을 증명하고 있다. 정말로 기억은 나지 않는, 그러나 꽤 유쾌한 기억들을 몇 가지 하드에 옮긴 우진은, 그들이 함께 큐브를 짜맞추며 놀고 있는 것을 마주한다. 이건, 그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지만, 그 뒤로 꽤 오래간 꽤 쏠쏠한 재미를 선사해주었던 놀이. 모스부호를 외워서 교신에 쓰자는 자신과, 못마땅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그의 쌍둥이 형. 우진은 그걸 보며 중학교 2학년 때쯤, 둘 중 하나가 모스부호로 키스하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차츰 이어지는, 별이를 처음 만나던 날. 범균이가 별이와 노는 저 때문에 삐쳐서 한참을 달래주어야 했던 날. 별이와 아빠가 함께 사라진 날. 그 뒤 몇 달 간, 혼란스럽던 시기를 백업하지 않은 채 넘기고 그들이 어느 정도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시기가 돌아왔을 때, 우진은 이번엔 거의 모든 날들을 백업하고 싶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범균이 미쳐서 정신병원에 가기 전까지, 둘이 함께 웃을 수 있던 그 몇 년의 순간들이, 그만큼 소중했으므로.
범균이 기억해야만 하는 날들은 늘어나는데. 줄어가는 용량은 그렇지가 못해서. 다급해진 우진이 지난 몇 주간, 그가 범균을 찾아다니며 블루버드를 파고든 일들을 먼저 백업했다. 그리고 다시 그 앞쪽의 기억으로 돌아가 그들이 처음 키스하던 순간을 백업하려 했을 때, 화면에는 용량이 부족하다는 문구가 뜬다.
그건 분명, 김우진의 인생에서 김범균이 잊지 말아야 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그것을 백업하지 않는다.
이거면, 형이 다른 건 다 잊더라도 난 기억하겠지.
김범균은 기억을 되찾을 테고, 김우진은 김범균에게 돌아갈 것이었으므로.
[범균우진] Untitled
김범균 씨. 오늘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이시는데.
진행자의 말에 김범균은 입가를 누르고 있기를 포기하고, 얼굴 전체를 하나의 환한 웃음으로 물들인다. 표정이 차갑기로 유명한 김범균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진행자는 잠시 하하, 웃다가 김범균의 답변을 기다리며 입을 다문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제가 가장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 대답을 듣고 김우진은 퍽 역겨운 기분이 된다. 어쩐지 꼭 티비 켜고 있으라 하더니. 기가 찬 웃음도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 이후로 이어지는 진행자의 질문에 김범균은 전부 비밀이에요, 라고 일축한다. 미친 새끼. 저 얼굴을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면에 김범균이 나오지 않는 순간부터 김우진은 더 불안해진다. 저 방송은 생방송이었고, 김범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이제 집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것을 뜻했으므로.
김우진의 기대에 반하지 않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김범균이 현관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김우진은 두꺼운 끈이 묶인 발목을 절그럭절그럭 끌고 김범균을 맞으러 현관까지 나간다. 끈이 딱 그를 현관 앞까지 갈 수 있게 하는 길이라는 것에서 느껴지는 김범균의 철저함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차피 자기 아니면 문도 안 열리게 해뒀으면서.
여기까지 안 나올 필요 없는데, 우진아. 하고 제 얼굴을 붙잡고 키스한다. 애초 키스를 할 요량으로 민트를 먹었단 티가 나서 더 불쾌해졌다. 만약 제가 나오지 않았다면 김범균이 제게 어떻게 했을지를, 요 며칠 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꼭 한번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었어. 내가 아주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바로 너라는 걸. 자꾸 사람들이 나랑 다른 사람이랑 엮어서 기사를 내잖아. 미친 것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너랑? 네 사진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했다간 다들 네 얼굴을 보게 될 테니까.
김우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벗으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는 김범균의 등을 바라본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서, 김범균을 기다리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한숨만 푹푹 새어나온다.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김범균과 자신은, 저 티비 스크린 한 장의 두께를 갖고 있었는데, 이게 언제 단 한 겹의 옷으로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범균우진] 쌍둥이 베이커리
한담대학교 앞 사거리의 한 모퉁이에는 작은 베이커리가 하나 있다. 입구가 건물 틈 사이로 놓여있어서, 이 베이커리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이곳을 찾아오기란 꽤 요원하다. 베이커리 문 앞에는 ‘쌍둥이 베이커리’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이 쌍둥이 베이커리라는 가게의 이름은 절반 정도 솔직하다.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것은 쌍둥이가 맞다. 틀린 것은 쌍둥이가 아니라 베이커리라는 단어다. 베이커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통의 빵집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빵을 몇 개 전시해 두고는 있었지만 위장용이었고, 그 빵을 먹는 이들은 손님이 아니라 주로 가게의 주인인 쌍둥이들 본인이었다. 빵집에 진열될 빵은 대개 계산대 안쪽, 조그만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 소파에 누운 둘이 도란거리는 말을 통해서 만들어지고는 했다.
김범균, 나 크로와상 먹고 싶어.
크로와상? 몇 개?
세 개쯤?
그러면 김우진이 먹고 남은 빵 하나와 김범균이 여분으로 만들어둔 빵 두 조각이 더 놓이는 식. 그렇다면 이 베이커리의 주인인, 쌍둥이들은 대체 이곳을 이어나가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누군가 베이커리의 문에 달린 종을 세 번 울리며 들어설 때에 밝혀진다.
아, 우진아. 손님 왔나 보다.
아씨, 벌써?
옷 제대로 입고 나와. 나 먼저 나가 있을게.
간만의 손님이니까, 말 좀 예쁘게 하고. 또 저번처럼 말도 안 된다면서 돌려보내면…, 알지?
김범균은 협박조로 말하는 김우진의 머리를 좀 헝클인 뒤에, 김우진이 그를 잡기 전에 빨리 손님을 맞으러 나간다. 손님은 이미 빵집에 들어와,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간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또래의 여성.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에게는 뒤에서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불안한 기색이 가득하다. 기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런 꼴이었으므로, 범균은 놀라지 않는다.
미리 연락 주신 박민영 씨, 맞으시죠?
네네.
빵이라도 하나 드실래요?
됐어요. 이 역시 예상했던 대답. 이어 우진이 나오고, 둘은 손님 앞에 나란히 마주 앉는다. 둘의 앳된 얼굴을 믿을 수 없는 건지, 잠시 혼란한 표정을 하던 손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그 녀석이 처음 나타난 건 지난 달 3일이에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자꾸 코피가 나요. 병원에 가 보면 아무 이상 없다 그러고. 스트레스라면서. 그러다가 지난주인가? 그 녀석을 봤어요.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목격하셨는지 얘기해주시겠어요?
지난주 수요일에요. 머리가 아파서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침대 밑으로 펜이 굴러 떨어졌어요. 거기 있더라구요. 새파란 날개에, 작은 사람처럼 생긴 게.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더니 그것도 저를 따라서 비명을 지르다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연기처럼.
아. 둘은 열심히 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많이 놀라셨겠네요. 여긴 어떤 경로로 알게 되신 거죠? 아. 인터넷. 네. 김범균이 그렇게 응대하는 사이, 김우진은 머릿속을 열심히 뒤져, 민영이 말한 것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려고 애쓴다. 작은 사람처럼 생겼다. 새파란 날개. 그렇다면 아무래도 요정일 텐데, 한국에서 요정이 출몰했던 적이 있나? 거기다가 머리가 아프고 코피가 난다니. 그것도 일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한 달이나 괴롭힌다고? 요정들은 대체로 작은 장난을 치지,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는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보통의 의뢰들처럼 귀신 얘기를 들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저 사람이 잘못 본 거거나.
잘못 봤을 가능성이요? 환각이란 게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게 아니에요. 아빠가 의사시거든요. 아무튼, 그리고 제가 굳이 그런 모습을 볼 이유도 없고. 그리고 이거.
열심히 설명을 하던 민영은,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파랑새의 모양. 사진을 마주한 김우진과 김범균은 동시에 표정이 굳는다. 그들이 이곳 베이커리를 세운 이유. 블루버드.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것이 남기던 표식과 흡사했다.